흉포의 극, 참학의 절, 마도 백백교의 죄상
독수에 참살된 교도
판명자만 백오십팔명
추정피살자 남녀 사백여명
범죄 사상 공전의 참기록
백백교 사건을 보도한 1937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사진 중앙의 인물은 사실 교주 전용해가 아닌 살인을 주모한 백백교의 총 참모격인 이경득(李敬得)의 사진이다.
1. 탄생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이며, 전신은 백도교이다. 정확히 말하면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운이 죽고 나서 교주 자리를 놓고 세 아들 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 아들은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를 만들어 독립한다. 그러다가 1930년,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을 비롯해 여러 범죄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 사이비 종교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난다.
그러던 것을 무사히 도망쳤던 차남 전용해(1895년생으로 추정)가 돌아와 비밀리에 백백교를 재건한다.
입교식은 돈 1원을 내고 행하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 후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세 번 손을 들었다 놓은 후
제제자 제제자 천혼도우 제여자 제여자 지후도우도 신인천주 임조화상고령천영주전장생노도학삼층삼계사신고우 삼층삼계현신도우(諸弟子 諸弟子 天混禱于 諸女子諸女子 地后禱又禱 新人天主 荏造化尙告靈天靈主前長生勞禱學三層三階司神告于 三層三階玄神禱于)
라는 이상한 주문을 7번씩 세 차례 외우는 것이었다. 입교 후에도 백백교에서는 성별에 따라 외우는 주문이 달랐는데, 성인 남자가 외우는 주문은 아래와 같았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위의 해괴한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성인 여자가 외우는 아래의 주문은 그래도 위 주문보단 나은 것이라 세간에는 덜 알려졌다.
백의부인선선감감응(白衣婦人善善感感應)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용으로는 '동자주문', '선녀주문'이라고 해서 각각 '백응선(白應善)', '백선응(白善應)'이라는 3글자짜리 주문을 따로 외워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팔도(八道)주문, 몇백 번을 외운다면 신을 볼 수 있게 된다는 통신(通神)주문, 옥황상제 다음 가는 능력을 부여해준다는 비장의 주문 등등도 있었다. 옛날 뉴스 아카이브를 잘 찾아보면 나오는데 어감들이 하나같이 이상하다.
종말의 날에 서양은 불, 동양은 물의 심판을 받아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避水宮)으로 옮겨가면, 대원님(백백교 교주)이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자는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 영주로 보내주고, 부귀영화를 원하는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설파했다. 그러나 시대가 혼란한 탓인지 그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금광 드립은 홍경래의 난 당시에도 나왔던 고전적 수법. 이는 조선시대 후기 각종 예언서들이 횡행할 때 유행한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고, 이제 '백백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설 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독립하여 백백교가 통치하리라는 주장까지 했다.
2. 범죄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말 그대로 혹세무민했다.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또한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지로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폭행했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성들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싫증나면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이외에도 배교자, 교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함께 살해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더 심해져서 신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도 하였고, 경찰에게 들킬까봐 죽이기도 했다. 또한 내부 다툼으로 부교주를 살해하고 매장까지 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백교 내부에는 이른바 '부엉이 부대'라고 불리는 첩보원들이 있어 신도들의 행동을 비밀리에 감시했으며, 신도들의 이상행동을 포착하면 그 즉시 간부들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엉이 부대'의 보고를 받은 간부들은 행동대원들을 시켜 신도들을 살해했다.
당시 체포된 24명의 간부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곤 학교의 문턱을 밟아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교주인 전용해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를 '신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에 철저하게 복종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살인을 저질렀다. 또한 가족 신도들을 지역별 지부에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도망치면 다른 가족들이 죽임을 당할까봐 복종하는 경우도 있었다.
3. 최후
조부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빼앗긴 유곤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흑막이 폭로되었다.
1937년 일본제국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했다. 전용해는 몇 달 후 솔밭에서 동쪽을 향해 누운 채 칼로 목을 찌른 사체로 발견되었으나, 얼굴을 산짐승이 먹어치운 탓에 신원 확인이 어려워서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전용해의 자식이 직접 보고 아버지라고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어 자살한 것으로 판정.
이 일은 당시 영어권 기사로도 보도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잡힌 사람만 해도 100여 명이 넘고 확인된 살인만 해도 300여 건이 넘는지라, 수사와 예심을 준비하는 데만 3년이 걸려 1940년에 첫 공판이 열렸다.
재개된 공판에는 무수히 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연일 언론에서 백백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인 행각보다는 교주 전용해의 무수히 많았던 첩들과 음란한 행위와 관련된 가십기사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첩이 60여 명이었으니...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 사건의 선고 공판 결과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다만, 위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진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곧 훨씬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런 놈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징역형을 받은 다른 간부들은 8.15 해방과 함께 1945년 모두 출옥하여 아래에 언급된 잔존세력을 만들거나 다른 사이비 종교에 관여한 듯하다.
그 이후 한국 사이비 종교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건이 되었다.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이 나올 때마다 상당히 자주 언급되며 다시 조명받곤 한다.
출처 : 나무위키

